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에즈 운하 (문단 편집) === [[제2차 중동전쟁]]과 [[이집트]]로의 귀속 === [[2차대전]] 이후 이집트 정부는 주식을 일부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운하 운영에 개입했지만, 최종적으론 영국이 운하를 통제하였다. 하지만 1952년 [[반영]] 노선을 표방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국에 [[유화]]적이던 [[파루크 1세]] 왕정을 무너뜨렸고, 내부 권력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한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56년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 나세르도 집권 초기에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이스라엘과 협상하면서 경제개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 미국에 접근하는 등 온건노선을 걸었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이 [[시큰둥]]하게 나오자 급선회해서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하고 [[친소]]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이집트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던 [[아스완 댐]] 건설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 막대한 수에즈 운하 통행료를 노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영국, 프랑스는 자국이 막대한 돈을 들인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 셈이니 반발하는건 당연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반 이슬라엘 성향인 나세르가 힘을 얻는 것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의미가 많이 희석된 편이지만, 국유화는 냉전 시기에는 '''공산주의'''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수에즈 국유화를 선언했던 압델 나세르는 쿠데타 이후 1세계와 2세계 양측에 양다리를 걸치며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는데, 혁명 정부의 경제적 지원에 미온적인 1세계보다는 적극적으로 구애해온 소련에게 꽤 기울어져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나세르는 중동에서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반이스라엘]] 선봉장의 이미지를 만들려했고, 이를 위해 [[홍해]] 아카바 만의 입구에 [[요새]]를 건설하고 해안포를 배치해 이스라엘의 [[아카바]] 항을 봉쇄하는 일을 저질렀는데, 나세르가 소련의 편을 들어서 수에즈 운하에 똑같은 일을 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냉전 시기 이 사태를 계기로 아랍이 소련 편에 들것을 우려한 미국도 압박을 놓아, 안보리를 소집해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의 반대로 거부 되었다. 미국의 안보리 철수 결의를 낸 다음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공습은 계속되었고, 미국이 제안한 철수를 요구하는 긴급특별총회는 찬성 64표 반대 5표(영국,이스라엘,프랑스,뉴질랜드,호주)로 통과 되었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였다. 같은 시기에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던 [[소련]]의 [[흐루쇼프]] 역시 으름장을 놓았는데, 영국과 프랑스에 [[핵무기|핵]]을 쓸 수도 있다고 대놓고 위협했다. 소련은 이미 [[소련의 핵개발|핵개발에 성공]]했고, 1953년에는 전술핵(RDS-4)의 개발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1953년 8월 23일에 RDS-4의 핵실험이 성공한다. 이후 RDS-4가 R-5M의 탄두로 장착된다.] 당시 소련은 딱 반년쯤 전인 1956년 5월 21일에 탄도 미사일인 R-5 Pobeda(NATO 코드네임 SS-3 Shyster)의 핵미사일 버전인 R-5M을 실전 배치했다.[* 미사일의 핵실험은 1956년 2월 5일이었다.]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200km였는데,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위성국이였던 동독[* Vogelsang, Zehdenick과 Fürstenberg/Havel의 두 곳에 배치되었다.]에 배치하면 런던까지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57년도에 세계최초 ICBM [[R-7]]이 개발되었다. 사정거리는 8000km된다. 수에즈 사태 당시에는 흐루쇼프가 핵전력 공갈을 많이 치긴 하였는데, 미국 측에서도 내막 완벽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폭격기의 경우, [[러시아 항공우주군/편제#s-2.8|장거리 항공 사령부]]에서 B-29를 카피한 [[Tu-4]]를 이 실전 배치했는데, 파생형중 하나인 Tu-4A는 소련 최초로 '양산된' 핵폭탄인 RDS-3의 투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Tu-4A는 양산기가 아니었고, 폭격기용 핵무기를 테스트하기 위한 실험용 개조 기체에 불과했다.[* RDS-3의 테스트는 지상 폭발이 아닌 공중 투발이었고, 이 기체가 투하했다.] 이후 소련은 [[Tu-16]]A를 양산하면서 1955년 즈음에 전략핵무기 투발 능력을 얻는다. 그런데 1956년의 소련 장거리 항공 사령부는 스몰렌스크(러시아 서부, 벨라루스와의 국경 근처)와 비니차(우크라이나),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토크 북동쪽)의 세 도시에 주둔하면서 Tu-4와 Tu-16 폭격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최단거리인 스몰렌스크부터 런던까지는 2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고, 1955년 기준 NATO의 가입국인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서독의 영공을 통과해야 했다. RDS-3와 RDS-37[* 1955년에 Tu-16A로 핵실험에 성공한 수소폭탄이다.]는 폭탄창에서 중력낙하로 떨어뜨려야하는 핵폭탄이었으므로, 투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영공에 진입해야하는 폭격기 투발 핵무기 한계상, 미국이 영공 통과를 허락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이상 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젠하워도 소련의 위협에 진심으로 믿어 위축 됐다는 점을 보좌관이 회고하고, 그와 국무부 차관인 [[하버트 후버]]와 비공개 대화에서 이 사태가 3차 세계대전의 발발 계기가 될 것을 진심으로 우려하였다.'소련은 어떤 무모한 모험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그들은 히틀러가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하고 분노했습니다.독재체제에서 그런 마음 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핵전력 정찰을 시작하였고, 59년도에 이르러서야 소련의 핵전력이 과장이였음을 확정하게 되었다. 즉 당시로서는 핵공갈에 대해 미국 측도 정확한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 영프는 나토니까 방위조약에 의거하여 미국도 참전하여야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방위가 보장되지 않아서 소련이 전쟁에 참전했다면 이스라엘과 했을 것이다. 3차대전의 위협은 미국이 동맹국이였던 영프에 압력을 넣는 데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으로 급부상해서 [[아랍]]권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였고, 이집트는 사실상 [[중동]]의 [[맹주]]가 되었다. 거꾸로 영국에게는 '이제 [[대영제국]]은 없다'는 걸 실감하게 한 굴욕이었다. 그래서 당시 살아있던 [[윈스턴 처칠]]은 이 결과에 격분하고 원통해했다고 한다. [[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 운하가 폐쇄[* 운하 양편에서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이 대치하면서 국지적 충돌도 있었기에 운하통행이 불가능했다. 이때 재수 나쁘게 운하에 갇혀버린 선박 15척은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장장 8년 동안 꼼짝도 못하고 갇혀서 분쟁이 종식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iXRCo7eBs|관련 영상]] 일명 [[https://en.wikipedia.org/wiki/Yellow_Fleet|황색 선대(Yellow Fleet)]]라 부르는 사건이였는데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쌓이며 선체가 노랗게 변했기 때문. [[1975년]] 상황이 종식되기까지 수에즈 운하 중앙의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Bitter_Lake|그레이트 비터 호]]에서 갇혀 있었다. 사태가 길어지자 이집트 당국은 각 선박별 [[우편번호]]를 지정해주는 배려(?)를 제공하기도 했었다.]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고,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 확장하였는데, [[2015년]]에 마지막으로 확장공사를 하였다. 현재까지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은 [[이집트]]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